‘곰탕’을 찾아 시간여행을 떠나다
서평자_ 조성면(문학평론가, 문학 박사)
“권력을 가진 자는 그걸 나눠줄 생각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권력을 나눠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권력자의 말을 따른다. 돈을 가진 사람이 돈을 쓸 때는 본인에게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권력자들은 본인에게 뭔가 필요할 때, 남을 위해 권력을 쓴다. 나눠주는 게 아니라 이용할 뿐이다.” (제2권, 87~88p.)
『곰탕』은 새롭지 않되, 새로운 소설이다. 『곰탕』의 ‘새롭지 않음’은 그간 보아왔던 시간여행을 주제로 한 SF들과 <터미네이터>나 <페이스오프>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의 모티프들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이고, ‘새로움’은 ‘곰탕’을 제재로 삼아 복거일·듀나·배명훈 등과는 질감이 다른 한국형 SF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특히 현역 영화감독이 쓴 첫 장편소설이며, SNS상에서 연재되던 작품이 오프라인으로 나온 것이라는 점 또한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 책의 미덕은 시간여행이라는 낡은 소재를 가지고 새로운 소설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아주 잘 읽힌다는 것이다. 영화계에서 다져온 오랜 경험을 통해서 어떤 이야기가 대중들에게 먹히고 힘을 쓸 수 있는지 잘 숙지하고 있다는 것이 영화감독 출신 작가의 장점일 터인데, 이 책은 작가의 그러한 장점을 잘 살린 퓨전 SF다. 간결한 문장에 용의주도한 구성, 그리고 시간의 뒤엉킴과 액션 영화 같은 한 박자 빠른 스토리 전개는 이 책을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가는 페이지 터너(page-turner)형 소설로 만들어내는 일등 공신이다.
그런데 소설의 시작은 다소 황당하다. 곰탕 맛의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 시간여행을 떠난다는 설정이 그러하다. 처음에는 우려가 됐으나 작품을 읽을수록 ‘그럴 수도 있겠다’에서 다시 ‘그래서 그랬구나’로 바뀌어 우려는 기우였음을 깨닫게 된다.
『곰탕』을 ‘곰탕’으로 봐선 안 된다. 구수한 제목과 달리 추억의 음식을 찾는 맛집 기행 이야기가 아니라 살인과 테러가 벌어지는 박진감 넘치는 활극이다. 아울러 그것은 SF일 뿐 아니라 2064년 대한민국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그리고 있는 디스토피아 소설 내지 사회소설로도 읽힌다. 이는 현재같이 금수저와 흙수저 사이에 ‘넘사벽’이 존재하고 승자만 독식하는 가파른 경쟁 사회의 틀이 미래에도 바뀌지 않고 지속될 것이라는 작가의 비판적 현실 인식이 외삽(extrapolation) 기법을 통해 구현됐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그린 2064년의 대한민국은 디스토피아다. 빈부격차는 더 극심해졌고, 살길이 막막해진 미래인들이 목숨을 걸고 시간여행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시간의 디아스포라들이요, 미래에서 건너온 난민들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의 주 무대인 부산만 해도 윗동네 사는 “가진 자들”과 쓰나미의 위험을 무릅쓰고 해변가에 사는 “없는 자들”로 확연하게 구별되며, 십 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쓰나미에도 “없는 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여전히 아랫동네에 터를 잡고 살아간다. 여기에 환경 오염과 조류 독감 등으로 인해 미래인들은 유전자를 합성한 가축을 만들어 사육하고 그 고기를 먹고 곰탕도 끓여낸다.
주인공 이우환은 진짜 곰탕의 요리 비법을 알아내기 위해 미래에서 현재로 건너온다.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맛집 곰탕의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 목숨을 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연히 이우환에게는 또 다른 목적이 있다. 가슴 속에 간절한 그리움이자 증오의 대상으로 남아있는 생면부지의 친부모를 찾고 만나보는 것―바로 ‘가족 찾기’다.
이우환의 가족 찾기와 사부곡(思父曲)이야말로 이 책을 이끌어 가는 이야기의 핵심이며, 이 지점에서 스토리와 제목이 따로 놀던 『곰탕』이 비로소 자기의 제목과 합치를 이룬다. 이런 가족주의와 그리움은 이 책이 SF활극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내는 추락방지 장치다.
그런데 이 식상한 가족주의야말로 정치인과 범죄자가 결탁하고, 빈부격차가 극심한 디스토피아에서도 사람들을 살아가게 만드는 삶의 동력이 된다. 사건의 고비 때마다 등장하여 가족들을 만나게 하고 사람과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것은 바로 곰탕인데, 여기에서 곰탕은 가족·소박한 행복·희망의 은유로 자리를 잡는다.
비행 청소년 아들에게 오랜 기다림과 정성으로 끓여 내놓는 아버지 이종인의 곰탕, 자기 아들의 뒤를 캐고 수사의 칼날을 들이대는 수사관들에게도 정을 담아 내놓는 따끈한 곰탕, 오랜 이별 끝에 부자를 상봉하게 만드는 곰탕은, 곰탕 그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불량 고교생 부모의 틈바구니에 끼어 오토바이 ‘뿅카’를 타고 부산 시내를 질주하며 어린아이처럼 마냥 행복해하는 이우환의 모습에서 우리는 문득 희망과 행복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온갖 이해와 가치와 이념이 충돌하고 길항하여 갈등 조정 능력의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지금 모든 이들의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맑히고 밝히고 훈훈하게 데워줄 종인과 우환의 따끈한 곰탕 한 그릇이라도 정녕, 있었으면 좋겠다.